| 내 용 |
로봇들의 월드컵에선 한국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자(强者)인 것을 아는가. 7년전 한국 과학자 주도로 국제대회가 창설된 이래 한국은 많은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일본에 버금가는 로봇 강국 임을 과시해왔다.
‘로봇판(版) 월드컵’으로 불리는 ‘세계 로봇축구대회’는 올해 제7회 대회(5월말·한국)부터 두 발로 걷는 인간형 로봇(HuroSot) 종목이 새로 추가됐다. 최고 난이도의 기술을 겨루는 이 종목은 KAIST(한국과학기술원) 대학원생 4명으로 결성된 ‘한사람2’ 팀이 4개국 5개 팀을 압도적 실력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이 녀석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마지막 순간까지 속을 썩이다가 대회 전날이 돼서야 겨우 제대로 움직이더라고요.”
박스 속에 갓난아기 처럼 누워있던 로봇을 껴안아 세우면서, 김동한(29·박사과정 5년차) 씨는 주절주절 푸념부터 털어놓았다. 세계 최강의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가 탄생한 KAIST 전자과 2228호는 여느 공대 연구실 풍경과 다를게 없다. 벽에 붙어 있는 몇 장의 로봇 관절 스케치가 이 방의 심상치않은 분위기를 암시해줄 뿐이다.
그러고 보니 ‘한사람2’ 멤버는 고향도, 개성도 제각각이다. 대전이 고향인 팀리더 김동한 씨가 수더분하다면, 서울 출신의 김용재(28·박사5년) 씨는 이론에 강하고, 제주에서 온 박기홍(28·박사4년) 씨는 꼼꼼히 챙기며, 막내 박재호(24·석사2년) 씨는 혼자 컴퓨터와 씨름하는 ‘고독파’다.
-몇달간 연구실에서 거의 매일 밤을 새웠어요. 아침 해가 떠오르는 걸 보면서 기숙사에 돌아가 잠깐 눈을 붙인 뒤 다시 나오곤 했죠.(박재호)
-이론적으론 저희 설계가 완벽했어요. 그런데 실제 로봇을 제작하다 보니 생각도 못한 트러블이 막 생기는 거예요. 천신만고 끝에 다리를 완성했는데, 이게 움직이지 않는 식이었죠.(김용재)
-시간과의 싸움이었어요. 하루가 아쉽더군요. 대회 날짜는 다가오는데,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거예요.(박기홍)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잖아요. 우리가 한국 최초로 시도하는 일인데. 벽에 부닥칠 때마다 모두 가세해 해법을 찾아가며 문제점을 하나씩 돌파해갔죠.(김동한)
-나중엔 다들 신경이 날카로와 지더군요. 충돌 일보 직전까지 간 경우도 있었어요.
-그래도 끝내 포기않고 달라붙은 것은 책임감 때문이었을 거예요.우리가 한국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 우리가 무너지면 누가 일본을 따라잡느냐 하는 거죠.
이들이 만든 ‘한사람2’는 46㎝의 키와 4·5㎏의 무게를 지녔고, 90㎝ 트랙을 40초에 주파한다. 이 미니 휴머노이드가 획기적인 것은 인간의 걸음걸이를 거의 완벽하게 재현한 점이다. 발바닥에 달린 센서로 지면(地面) 상태를 감지, 1초에 1000번 꼴로 동작을 수정해가며 자율 보행한다. 이 때까지 일본 소니와 혼다자동차 만이 갖고 있던 고난도 기술이었다.
-두 발로 걷는 것 자체는 어려운 기술이 아니예요. 장난감 로봇도 많지 않아요? 그러나 그것들은 그저 발을 기계적으로 앞으로 내딛을 뿐이예요. 울퉁불퉁한 험로(險路)나 경사로 같은 곳은 제대로 못 걸어요. 뻣뻣한 통나무 같은 거죠.
-우리 로봇은 이론적으로 어떤 길이든 갈 수 있어요. 오르막 길이라면 발바닥 센서로 경사도(度)를 감지, 무게 중심을 앞으로 옮긴다든지 하는 식으로 적응해가며 움직여요. 옆으로 걷고 회전할 수도 있어요. 일본만이 가능하다던 기술을 우리가 해낸 셈이죠.
-‘한사람2’엔 총 22개의 모터가 달려 있어요. 발목·무릎·골반에서 머리·허리·팔꿈치 까지 인간의 관절에 해당되는 곳에 하나씩 들어가있죠. 각 관절의 동작을 쉴새없이 제어해가며 수십 가지 조합(組合)으로 연결하니까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을 낼 수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 걸어다니는 컴퓨터라고 보면 돼요. 몸통에 펜티엄급 컴퓨터가 내장돼, 이 컴퓨터가 주변 상황을 분석, 판단해서 200분의 1초 마다 한번 꼴로 각 부위의 모터에 지시를 내려요.
‘한사람2’의 압도적 파워는 이번 대회에서 입증됐다. 달리기·장애물경주·페널티킥의 3개 경연 종목에서 싱가포르·호주·뉴질랜드 등의 출전 팀을 여유있게 따돌렸다. 넘어지고 방향이 헷갈리기 일쑤인 다른 로봇선수들과 달리 ‘한사람2’는 시종 자연스러운 몸동작으로 걷고, 방향을 틀며, 공(테니스공)을 걷어 차 감탄을 자아냈다.
이들은 “우리의 타깃은 소니”라고 입을 모았다. 로봇 분야의 세계 최강 소니의 ‘SDR-4X’ 휴머노이드를 따라잡을 목표였다는 것이다. 소니가 올 연말께 ‘고급 승용차 1대 값’에 시판할 SDR-4X는, 두 발로 걷고 춤추며 얼굴·음성 인식도 가능한 초정밀 애완용 로봇이다.
-완성도 면에서는 ‘SDR-4X’에 한참 못 미치지만, 핵심기술은 떨어지지 않아요. 적어도 연구용으로 제작된 휴머노이드 중에선 ‘한사람2’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합니다. 선진국 어느 대학의 휴머노이드를 보아도 우리 만큼 인간의 동작에 근접한 것이 없어요.
-소니는 수백, 수천 명이 로봇에 매달리잖아요. 돈도 물쓰듯 하고. 혼다의 경우 휴머노이드 ‘P2’를 개발하는데 6000억엔(약6조원)을 투입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한사람2’는 우리 4명이 1년동안 1600만원을 들여 만들었어요. 필요한 부품을 구하는 것 조차 힘들었죠.
-몇주일의 시간과 약간의 돈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SDR’ 비슷한 기능을 낼 수 있어요. 머리에 카메라를 달아 영상 인식 기능을 추가하고, 상반신 동작 제어 같은 몇가지 미완성 부분을 보완하면 돼요. 설계는 다 돼 있어요.
-어떻게 이런 고난도 로봇을 만들었나구요? 그냥 ‘확 미치면’ 돼요. 세계 최고의 로봇을 만들고 말겠다, ‘우주소년 아톰’의 탄생을 앞당기고 싶다는 열정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 같아요.
이들을 로봇에 미치게 만든 것은 소년 시절 탐닉했던 로봇 만화였던 모양이다. 김동한 씨는 “데즈카 오사무(‘아톰’의 원작자)와 김청기(‘로봇태권V’의 감독) 선생이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했다.
-70년대에 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치고 아톰에 열광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아톰이며, 마징가Z를 보면서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움직이면서 생활의 일부분이 되는 로봇을 꿈꿔왔어요.
-데즈카의 만화 원작에서 아톰은 내년(2003년)에 탄생하는 것으로 설정돼있어요. 그러나 실제 휴머노이드 연구는 이제 막 시작한데 불과해요. 만화의 상상력이 현실을 몇십 년 앞선 셈이죠.
-IBM의 수퍼컴퓨터 ‘딥 블루’가 체스의 세계 챔피언을 꺾은 것이 5년 전이었죠. 저희도 로봇 팀이 인간의 세계 선발팀과 11대 11로 축구 시합을 벌여 이기는 꿈을 꾸고 있어요. 아마 40~50년 쯤 뒤면 가능할 거예요. 빠르면 저희들 세대에 실현될지 몰라요.
-21세기는 ‘로봇의 세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도와주는 서비스 로봇에서 엔터테인먼트(오락)형 로봇, 산업·군사로봇까지, 용도가 무궁무진해요. 이런 황금시장을 일본에 넘겨줄 수는 없어요.
한국엔 아직 제대로 된 로봇 전문 연구소도, 로봇 산업도 없다. KAIST 졸업 후 로봇 연구를 계속할 수 있을지 자체가 불투명한 속에서도 로봇에 몰두하는 이유를, 실버 체인 목걸이로 멋지게 치장한 김용재 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자기와 닮은 존재를 만들려는 인간의 본능 아닐까요? 뭐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재미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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